〈시절인연〉
누구든지 마음 속에 화두(의심)를 품고 정진하는 구도인(求道人)에게는 반드시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게 있는 법이다. 즉, 크나 큰 의문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한동안의 세월을 지내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의문이 마침내 풀리는 때가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두고 "화두(의심)를 타파했다"고 하는 소위 "시절인연"인 것이다.
이른바 깨친 사람은 이러한 과정을 반드시 겪어왔거니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러한 "시절인연"이라고 하는 것을, 그저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즉, 근기가 아주 높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범상치 않은 현상쯤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평생을 번뇌와 고통 속에 사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중생이 바로 그대로 부처다" 라는 것이며,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시절인연"인데, 이 시절인연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의문을 품고 "끈질기게" 붙들고만 있으면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겨울철엔 가끔 길에서 군밤장수를 볼 수가 있는데, 다 구워진 밤이란 언제나 한쪽이 터져있게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불에 달궈진 밤은 속이 점점 팽창하게 되는데 밤껍질 속에서 그 부피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마침내 두꺼운 거죽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중생의 무명(無明)이라는 것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두껍고 두꺼운 것이라고 해도 끊임없이 의심해서 붙들고 늘어지면 마침내 어느 한 순간에 깨침을 얻어 억겁의 무명을 타파해 버리니, 이것은 마치 불에 점점 달궈진 밤이 끝내 그 부피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 두꺼운 껍질을 한 순간에 터뜨려버리는 것과 너무도 흡사한 것이다.
의심을 하는 자에겐 누구나 깨침의 기연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밤을 굽는다면서 불은 미지근하게 한다든지, 혹은 한 때는 뜨겁게 지폈으나 다음 순간에 곧 불을 꺼버린다든지 하면 언제까지나 군밤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화두를 들고서도 이와같이 하는 사람에게는 깨침이란 항상 머나 먼 이야기가 되고말 것이다.
중생이 스스로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함으로서 끊임없이 악업을 짓고 제 자신을 한 평생 번뇌와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것은 길고 긴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화두참구란 이러한 무명을 한 순간에 타파하는 '뜨거운 의심'을 내는 행위이다.
제 스스로 근기가 낮다, 어떻다 예단하지 말고 각자의 일상생활 속에 부지런히 참구 노력함으로써 무명을 타파하여, 참으로 온 시방삼계의 주인이 되어보자.
懶牛, 1998. 5. 11
Posted by 홍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