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어.
돌아갈 뿐이야.
아침 이슬이 공기 속에 섞이는 것처럼,
그래서 물기를 머금은 그 공기가 다시 찬 기운과 만나
이슬로 내리는 것처럼 말이야.
모든 건 그렇게 돌아 가는 것뿐이야.
마음속에 기다림이 있는 한 우리는 아무도 사라지지 않아.
꽃들도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그렇게 떠날 뿐이야.
- 김재진의 <어느 시인 이야기> 중에서 -
* 내가 누군가의 수족이 되고,
눈이 되어, 입이 되고, 귀가 되어
멋진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로인해 그 누군가가 토해 놓은 '날숨'을
나의 '들숨'으로 마실수만 있다면 참 행복하겠습니다.
그러면 '너와 나의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 되고
덜 힘들고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사랑을 시작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치 꽃을 키우듯 물과 거름을 주고 햇빛을
쏘여야 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당신이 마음을 쏟은 만큼 깊어집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사랑이 자라기만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사랑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 문미화의《사랑단상》중에서 -
* 사랑도 마치 꽃과 같습니다.
물도 주고 거름도 잘 주어야 잘 자라납니다.
하루만 물을 안줘도 윤기를 잃고 시들해집니다.
어제만큼 오늘도 잘해 주고, 오늘만큼 내일도
잘 해줘야 늘 싱싱하게 자라납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얼마 전 영면한 경영학 창시자 피터 드러커의 글 중에는 가슴에 깊이 새겨야할 금언들이 많습니다. ‘당신의 경쟁사로 하여금 당신 회사를 쓸모없게 하는 것 보다 당신 회사가 스스로 자신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비용이 덜 들고 이익이 더 크다’는 말씀도 대단히 큰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실전 경영의 대가인 빌 게이츠 역시 다음과 같이 동일 맥락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자사 제품이 2~3년 내에 구식제품이 될 것이며, 이는 자신들에 의해서 혹은 다른 기업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실제로 면도기 세계 1위 업체 질레트는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변화를 창조하는 데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질레트는 트렉Ⅱ라는 이중 면도날이 달린 면도기를 출시, 최고조의 판매율을 보일 때 면도기 헤드가 움직이는 아트라 회전 면도기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아트라가 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을 때, 이중 면도날이 따로 움직이면서 충격을 흡수하는 센서라는 신제품을 출시하였고 이 제품이 기존 시장을 완전히 뒤집어 버려 전 세계 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을 때, 3개의 회전 면도날이 달린 마하 3을 내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질레트는 세계 시장의 65% 이상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광현, ‘스스로를 공격하라’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얼음 위를 걸어갑시다.
어떤 용감한 사람보다도 먼저
아직 길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가 길을 만들어 갑시다.
사랑하는 이여, 두려워하지 마오.
발밑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얼음은
끄덕 없습니다. 비록 얼음은 갈라지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 괴테의《괴테어록》중에서 -
*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나도 끄떡없다는 것을
이번 바이칼 얼음 호수를 달리면서 실감했습니다.
탱크가 지나가도 괜찮은 얼음이 갈라질까봐 지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이 깨질까봐
미리 걱정할 것 없습니다. 믿는 마음과
사랑이 강하면 얼음 위뿐 아니라,
물 위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